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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7. <요재공>지암공휘택철묘갈명(志岩公諱澤哲墓碣銘)
1. 문헌 목록 〉22. 22世 〉9. <부정공>처사휘종현(연승)가장(處士諱鍾賢(淵昇)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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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정공>국회부의장 춘산 연하 행장(國會副議長 春山 淵夏 行狀)
<정읍공후>국회부의장 춘산 연하 행장(國會副議長 春山 淵夏 行狀) 公의 諱는 淵夏요 號는 春山이며 三選 國會議員으로 十二代 國會副議長을 歷任했다. 上祖는 고려 光錄大夫 檢校大將軍으로 諱는 璋이시며 貫鄕 玉川氏의 始祖이시다. 고려말 改革에 同參하던 李成桂가 變心하여 朝鮮建國을 單行하자 不事二君하며 開城 杜門洞에 칩거한 고려忠臣 杜門洞 七十二賢중 父子 同伴한 유일한 氏族으로 高麗 檢校門下侍中 玉川府院君이며 號는 農隱이요 諡號는 忠獻이다 性理學의 대가며 四隱(圃隱 牧隱 陶隱 冶隱)의 학문적 선대로 후일 五隱이라 불리며 자손에게 權力을 貪하면 三族이 滅하고 財物을 貪하면 兄弟(집안)가 멀어지니 吾宗은 愛親敦育(애친돈육)하고, 祖父 上은 大父로 孫 下는 孫으로 칭하며 宗氏란 呼稱이 없는 조선 唯一의 姓氏로 이끌고 儒學의 五德(仁義禮智信)중 형이上,下학을 兼備한 義자를 後孫에게 箴言하신 忠獻公 諱 元吉이 四世祖이다. 公의 五世祖는 李成桂의 잦은 回諭에 충헌공은 순창 萬日寺에 起居하는 無學大師에게 子의 移住 터를 부탁하며 無學은 趙자가 五行(金木水火土)중 木으로 四方十里 들에 강과 하천이 어울러 木의 相生인 水가 많고 세 마리 거북이(大龜 龜山 鰲山) 놀며 바위배가 떠있는 形局의 地名을 배舟 바위巖자를 써 舟巖이라 名하고 충헌공의 子를 移住시키니 向 順天의 始初人으로 諱는 瑜요 號는 虔谷이며 고려 司馬試文科하여 典農寺副正을 지내고 조선조에 漢城判尹을 除授하나 固辭하였다. 井邑縣監으로 清廉 愛民하고 學堂을 세워 治績하여 功德碑와 輿地勝覺에 실어 擧揚받은 公은 端宗 復位事件으로 父 參議公과 叔父 節愍公이 絶命하자 休職하고 落鄕하여 四兄弟(智山 智崑 智崙 智崗)가 謙川舍에 相好亭舍를 짓고 後學을 지도하며 兄弟 友愛를 다한 井邑縣監公 諱 智崑이 公의 七世祖이다. 號는 龜邨 諱 炳寬으로 스승(尹秉憲 傳愚 申得求)을 求하여 조선 百代儒學者에 오르며 龜村草堂을 열어 敎育하고 일제 강점기 戶籍法이 單行되고 淳昌趙氏 湖南파 本鄕이 玉川으로 名記되자 先代의 착오로 吾宗의 절반을 잃었다며 恨歎하고 湖西파와 合議하여 族譜統合을 推進하나 일제의 斷髮令 創始改名 書堂撤廢 등에 抗拒하며 飛龍 如存室 松廣 超然亭등에 피신 隱居로 중단 된다 趙門제자로 勝鉉 擎韓을 비롯 允祚 東潤 홍집 圭詢등이 마지막 弟子며 龜邨公은 公의 再堂叔이다 考의 諱는 勝鉉 號는 淸宵로 龜邨公에 受學하고 일제 강점기 蠶業契(잠업계) 기금을 臨時政府에 送金하고 단순 公金橫領으로 一年 獄苦를 치르며 白岡 擎韓은 中國으로 떠난다(1922년) 順天邑 동외동에 동진工場(원목판재공급) 運營하며 臨時政府 전남 東部七郡 獨立資金 도책으로 二年의 獄苦를 더 치르며 臨時政府의 有功表彰을 받는다 解放後 建準순천위發起人 國民會議순천지구위원장 第二代總選입후보 麗順事件복구위원장 순천군 市昇格 成事등 지역발전에 貢獻하고 서울에 移住하여 귀촌공의 遺旨를 받들어 순창조씨 湖南 湖西파 統合宗親會를 創立하고 初代會長이되며 統合大同譜를 추진하나 6.25 4.19 5.16등 國政混亂으로 中斷된다. 春山은 考(부) 勝鉉 孺人(모) 尙州朴氏의 六男妹(三男三女)중 三男으로 누님과 여동생 두명이 있으며 順天市 住巖面 龜山里에서 出生 住岩初等學校(十三會) 順天中.高 一會(순천公立中五年制 順中高 同窓會設立 初代 會長) 서울대 中退(戰時로 學事中斷)하고 光州高法判事누이 平澤林氏와 婚姻 膝下에 一男(桂民) 三女(桂華 善華 銀華)를 둔다 甲子一九二四年 四月 二日 生으로 一九五三年 政界 入門 一九九七年 政權交替 후 隱退하며 丙戌 二千六年 八月 二八日 卒 住巖 飛龍 山5-1 鶴峯 先塋 癸坐다 묻지마라 갑자생(강제징집과 탈출)) 춘산은 갑자생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어 몽고 만주접경 154군 부대에 편성되나 일차 탈출은 실패하고 백오명이 두 조로 나눠 2차 탈출을 감행하여 몽고에서 신의주까지 오십육일 간의 사투 끝에 춘산 조 오십삼명 중 십칠명 만이 생존 탈출에 성공 한다 정치입문과 4대총선(개표부정) 춘산은 민주국민당(당수 해공 신익희)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1953년)한다 四捨五入 개헌으로 삼선을 목표한 자유당 이승만의 독재를 막고자 통합야당 민주당창당발기인으로 청년당원의 대표가 되어 대표최고위원 신익희 최고위원 조병옥 장면 곽상훈 백남훈의 민주당이 창당된다(1955년) 정 부통령선거에 백만시민이 한강백사장을 메우게 한 신익희가 선거 운동 중 사망하고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된다(1956년) 사대총선에 순천승주 민의원으로 출마하여 자유당 이형모와 일전을 불사하나 공권력을 동원한 금권 관권의 부정선거와 개표부정(개표장소를 당초 전기가 있는 순천시소재 승주군청에서 하기 로 돼 있으나 서면 초등학교로 장소변경 발전기와 카바이트 불을 밝히며 개표 중 춘산의 표가 앞설 때 마다 발전기를 끄거나 전선을 자르고 가스불을 끄는 등 개표부정을 자행함)으로 초선의 꿈이 좌절된다 4.19와 5대총선(춘산국회입성) 4대정부통령 선거(1960년)에 민주당후보 조병옥이 미국에서 병사하고 자유당 부통령후보 이기붕 주도하에 공무원을 통한 사전투표등의 3 15부정선거로 이를 규탄하는 마산시위에서 김주열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며 전국으로 확산하는 4 19학생의거로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춘산은 조직부 차장으로 민주당을 수권정당으로 태동시키고 당내 신구파의 화합을 위해 신풍회를 조직하여 당의 실질적인 업무를 주도하고 내각제 개헌을 통한 오대총선(민 참의원선거)에 승주로 출마하여 국회에 입성한다(1960년) 5.16쿠테타와 장면총리 시경국장 이귀영은 인천첩보부대장 이종태의 박정희 혁명계획누설을 보고 당정은 박정희 소환을 결정하나 국방부장관 현오석 참모총장 장도영등이 낭설로 간주 재무장관 김영선의 박정희 면담과 국방위원장 이철승의 경고로 일단락되며 춘산은 장면총리에게 박정희 전출을 요청 대구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발령한다(4월) 박정희는 남산 외교구락부에 이철승 조연하 김재순을 초청 혁명은 낭설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연막을 친다(춘산과 박정희의 첫 상면) 5월16일 새벽3시경 총성과 함께 쿠테타가 시작되고 그린 미 대리대사와 맥그루더 미8군사령관은 쿠테타반대 성명을 방송발표하고 미8군과 기갑사단 1군사령부(장군이한림)에 출동준비를 완료하고 장면총리의 진압명령을 기다리나 행방이 묘현하여 선우종원 한창우등은 장면총리의 행방을 찿고 춘산은 우선 국군병력의 출동을위해 1군사령부 보좌관 김중령차를 타고 원주로 향하나 차량의 고장으로 하루를 허비하며 장면이 혜화동 갈멜수도원에 있다는 수행비서 이성모의 제보로(17일15시) 장박사를 면담한 한창우(국회의원 경향신문사장)는 유혈충돌을 반대하며 육성성명도 내지않는 장면의 무능함에 분개하고 군부의 쿠테타는 성공한다 춘산은 반혁명세력으로 몰려 군사재판에서 10년형을 받고 수감되어 복역중 육십이년 출감되어 사면 복권된다 6대 총선과 박정희의 회유 정치규제가 풀린 춘산은 신풍회를 중심으로 민주당을 재창당하고 박순천을 대표최고위원으로 하고 춘산은 총무부장으로 당을 재건하다 6월 총선에는 공천권을 위임받아 조직부장으로 총선을 대비한다 김종필은 춘산에게 정치인이 부재한 군부정권에 공화당을 맡아주기를 부탁하며 박정희가 공화당 공천자 명단에 승주 조연하를 손수기명 했다며 회유를 권하나 이를 거절하고 민주당으로 출마 한다 분노한 박정희는 춘산의 집안당숙으로 선친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선친의 권유로 임시정부에 들어가 국무위원을 지낸 백강 조경한을 승주에 출마 시킨다 중앙당을 창당하고 총선을 총괄하던 춘산은 자신의 지역선거를 포기하며 4대와 6대 두 번의 총선에서 오종에게 발목을 잡히는 수모를 격는다 김대중 김영삼의 40대 기수론 공화당발의로 삼선개헌이 통과되고 제7대 대통령선거 신민당후보 지명대회가 열렸다(1970년) 당수 유진산은 야당의대통령 후보는 당수가 지명해온 관례를 깨고 야당을 존속시킨 공로로 신풍회 대표 이철승의 후보지명을 보류하며 사십대 기수론을 주장한 김대중 김영삼의 경선을 선언한다 1차 투표에 춘산은 신풍회대의원에게 백지투표를 지시하고 김영삼이 승리하나 과반수 미달로 정회하자 김대중은 춘산에게 자신의 명함에 이후 당내경선에 양보하겠다는 서명을 하고 신풍회 대의원의 지지로 김대중은 역전하여 대통령후보가 되며 춘산과 김대중은 동교동계를 창설하여 김대중 정치의 기반이 된다 8대 총선과(춘산당선) 십이 항명 파동 자유당보다 더한 7대 총선의 부정선거와 군부독재에 반감한 국민은 8대총선에 야당지지로 나타나며 춘산도 당선 된다 춘산은 원내부총무로 박정희의 삼선개헌을 의석수 부족으로 막지 못한 신민당은 실미도 특수부대사건 광주대단지사건 사법 파동등의 책임을 물어 경제기획원장관 김학렬 내무부장관 오치성 법무부장관 신직수 등 탄핵을 상정하여 박정희의 영구집권계획에 반대하는 공화당내 비주류세력(김성곤 길재호 김재순 김형욱등약20명) 설득하여 내무부장관 오치성을 탄핵하며 국회가 영구집권을 꿈꾸는 박정희에 대한 경고로 십이 항명 파동이라 한다 김대중의 호남공략과 전남도당위원장 선거(고무인투표) 신민당 도당위원장 선거가 마무리 되 가고 전남도당 선거를 수일 앞두고 당내는 물론 각지역구에 지지기반이 약한 김대중은 호남부터 기반을 닦고자 춘산에게 위원장 출마를 권유하며 당시위원장인 이중재가 춘산을 부위원장으로 임명하여 서로의 경합을 피하자고 약속되어 난감을 표하나 김대중의 간청으로 출마하며 이미 선거운동이 마무리되어 열세를 직감한 춘산은 당시 당내투표는 선택자의 이름을 쓰는 기명투표로 개표 후 필적으로 지지성향이 알려지는 폐단을 지적하며 기명대신 이중재 조연하 이름을 새긴 고무인을 찍게 하는 비밀투표를 하여 구파의 이중재 지지자들의 산표를 유도하여 당선 된다 이후 춘산은 이중재에게 출마가 본심이 아니었음을 사과 한다 호남국회의원 분노와 여천국가산업단지 국회 내에서 박정희의 영구집권 계획이 가시화되면서 전남 공화신민 양당 국회의원 전원이 사표를 작성 춘산사무실로 제출하고 춘산에게 박정희와 단판 할 것을 요구 한다 명목상 전라도 홀대로 지역 발전의 불균형이 심각해 지역민을 대 할 수 없다는 구실을 삼아 박정희의 결단을 지연시키고자 결심한 지역구의원의 충정이었으나 군부독제하의 모든 언론은 침묵하고 청와대 면담요청은 거절되며 김종필이 방문하여 호남의원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국가 산단으로 지정된(1966년) 여천 국가산단과 순천 광주 간 고속도로를 즉시 시행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표는 반려되었다 이후 두 사업은 지체 없이 추진되었다 10월유신과 박정희의 보복 대통령선거와 8대 총선에서 고전하고 국회의 내무부장관 탄핵과 호남국회의원 사표파동으로 장기집권의 불안을 느낀 박정희는 유신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계엄령선포 헌법 개정을 골자로 한 대통령담화를 발표한다(1972년) 박정희는 야당의원 13명을 손수 낙점하여 구속하고 특히 춘산에게만 뒤통수타격 각목폭행 타격기계폭행 물고문 엘리베이터고문 진공 고문등 특별고문이 가해지며 2년의 옥고를 치르고 형집행정지로 출감하자 고문담당 대공 분실장 박모 준장은 춘산에게 사죄하며 회유거절 내무부장관탄핵 호남국회의원 사표 파동등 몇 가지를 예시하며 춘산을 부패정치인으로 낙점할 자백을 받아 라는 박정희의 직접지시가 있었다고 실토 한다 중소기업 최초 정치사찰과 중형의 죽음(덕산제과사건) 춘산의 중형 英基는 조문을 규합 덕산제과를 설립하고(사장 영기 전무 연모 공장장 휴옥 총무부장 휴인) 성장 운영 중 세무사찰과 과자 왕돌이의 로고가 박정희를 비하하고 북한을 찬양한다는 누명으로 도산시키며 김대중과 연관된 기업 특히 전라도 기업은 김대중의 선거자금 공급원으로 간주 모두를 부실 부패 간첩혐의로 몰아 정리 한다 춘산의 중형 영기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며(1977) 문상 온 김대중은 제가 형님을 죽였다며 통곡하고 “어려운 야당을 돌봐준 은혜로 형님의 후손은 제가 책임지겠다”는 위로를 남기고 떠난다 새마을 운동과 시멘트 70포(극에 달한 야당 탄압) 1970년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생활환경 개선 사업을 먼저 시행하며 전국 3만3천여 각 마을에 시멘트 336포를 우선 지급하고(553포선별 지급) 진입로 안길 담장 지붕 등을 국고지원과 일부 주민부담으로 전국에 시행 된다 춘산의 고향마을은 140호가 넘는 순천 농촌마을로는 큰 마을이나 환경개선사업 5년간 한건의 사업도 없었고 환경사업 마지막 년에 시멘트 70포를 회관 마당에 야적하자 주민들이 외면하여 6개월 후 돌 더미가 되어 버려지는 사건이 발생 새마을 사업의 편향성이 중앙지(동아 경향 중앙신문 등)에 보도 되고 춘산의 고향이라는 문구가 없었음에도 춘산고향마을을 부각시킨 책임으로 언론사 편집국장들은 중정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며 국회에서는 새마을사업관련 질의 때마다 회자되는 유명한 사건이 됐다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민추협을 반대한 김대중) 쿠테타 세력 중 박정희의 장기집권으로 혁명 가치가 퇴색되고 국민의 원성이 높다는 실정을 대변한 온건파대표 김종필이 일본으로 망명하고 8대국회에서 내무부장관 탄핵에 동조한 김성곤 길재호등은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며 같은 동지였던 김재규는 부마사태를 계기로 박정희를 암살하여(1979) 공화당정권은 막을 내린다 공안사범 특별사면(1983)과 정치규제해금(김대중 김영삼 김상현 제외) 으로 동교동과 상도동은 각자 조직정비를 하며 김영삼은 양 세력의 협의체를 만들어 추후 야당 재건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제의가 오나 동교동파는 김영삼이 당대표시 김옥선 의원 탄핵 계엄 하에 야당총재의 무능 정보부에 취조 시 정치포기 각서 제출 후 석방 등을 사유로 합류 거절이 우세하나 춘산은 이를 설득하여 공동대표 김영삼 김상현(김대중대표대행) 동교동50명 상도동50명이 외교구락부에 극비회합 오후7시 5분 만에 선언문을 낭독하고 민추협이 결성된다(1983년) 정치규제 하에 관변야당에 실망한 국민들의 성원으로 민추협의 위상이 커지자 미국 망명중인 김대중은 초조함을 느끼고 김홍일을 통해 민추협 해체를 요구 한다 이는 동교동내에 민추협 비 참여파의 모략이 김대중의 눈을 가린 영향이 컸다 김대중을 위해 목숨을 걸고 활동 하고 있는 동지들을 매도한다며 김홍일을 호통한 김상현도 이를 계기로 김대중의 견제를 받는다 신한민주당창당과 12대총선(춘산 구로당선) 12대총선일이 발표되고 춘산은 신한민주당 창당대회를 열어 연장자 이민우를 총재로 하고 자신은 수석 부총재와 조직특위위원장을 맡아 25일간의 짧은 일정에 중앙당창당 지구당창당 공천확정 선거운동 등을 동시에 추진하는 여정에 순천지역구를 허경만에게 물려주고 구로구에 출마 한다 미국에서 돌아온 김대중은 민추협이 창당한 신민당을 두고 관제야당인 민한당을 지원하는 이중성을 보이며 구로선거구에 김홍일 측근들을 보내 민한당 김병오를 지원하다 춘산에게 걸려 호통을 맞고 철수 한다 민추협의 후신인 신민당의 돌풍으로 제1야당이 되며 총선 후 민한당등 야권은 신민당에 흡수되어 103석의 거대야당으로 탄생 된다 국회부의장 파동과 처의 죽음 12대국회가 개원되고 야당국회부의장에 춘산이 지목되나 암투병중인 김녹영을 국회부의장에 임명 일본에서 국빈으로 암수술을 받게 하나 사망하고 공석의 부의장에 당연히 춘산이 지명 될 것이라 믿었으나 김대중은 처 언니의 사위인 유재연을 추천하나 추문으로 사퇴하고 이용희를 재 추천 한다 뉴스를 접한 춘산 처는 그분이 왜?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혼수상태에 빠지고 국회에서는 서울대 출신을 주축으로 여야의원 들이 연합하여 김대중이 추천한 이용희를 압도한 표차로 춘산을 국회부의장에 당선 시킨다(국회대학파파동) 춘산 처는 2년의 병고 끝에 사망 한다 김대중은 춘산이 조직특위위원장을 하면서 김상현과 공모 공천권을 팔아 부를 축적하고 신군부와 손을 잡았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특유의 사쿠라설로 음해하나 정치권에서는 오히려 은혜를 모르는 냉한이라며 김대중의 비판으로 회기 된다 김영삼의 결단과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13대 대통령선거에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가 당선되며 신군부 정권을 연장시킨 양김은 원망의 대상이 되고 김영삼은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자유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14대 대통령에 당선 된다 춘산은 양김의 분열에 회의를 느끼며 정주영의 권유로 통일 국민당 고문으로 위촉되어 생전에 바램인 정치입문자의 교육을 위한 정치인 대학원 설립을 약속받으나 대선 후 김대중과 정주영은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 떠난다 김영삼은 임기 1년을 앞두고 춘산에게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의 시나리오를 설명하고 춘산은 야권원로 13인을 설득하여 청와대 김영삼과 대면하고 계획을 수립 한다 당시 김대중은 40대기수론 이후 야권 대통령후보를 유지하기 위해 유진산 유진호 양일동 박순천등 원로들을 사쿠라로 매도하고 자신의 평생 동지인 조연하 김상현 마저 매도하는 우를 범하여 전라도에서는 신격화 되었으나 타도에서는 야권의 분열을 초래하고 박정희와 결전에서 영호남 지역분할이 고착되어 세력의 확산이 어려운 상태로 김영삼은 경기지사 이인제를 출마시켜 야권 김대중 비토세력과 영남표를 흡수하여 이인제가350만표 이상을 득표하고 춘산이 구 야권세력을 설득하면 승산이 있다는 분석 하에 15대 대선 1년 전부터 선거운동이 시작되어 김대중은 15대 대통령선거에 역대 최소표차인 39만 표 차로 당선 된다(1997년) 춘산은 김영삼에게 내처와 중형을 죽음으로 이끈 김대중을 도울 수 없다 다만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평화적 정권교체를 위해 정치인생의 마지막 소명이라 생각한다는 심경을 피력하고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춘산의 소명을 대변 한다 김대중의 후회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춘산에 대한 자신의 불찰을 후회하며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매월 생활비를 보내나 춘산은 4개월째 돌려보내며 나는 김대중을 도와준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올바른 정치를 위해 일했으니 나에게 빚진 게 없노라 하며 거절 한다 김대중은 임기 막바지에 청와대 정무수석에 정치경험이 전무한 춘산 집안 언론인 조순용을 임명하며 마음에 빚을 대신 한다 김종필의 회고 5.16의 실제적 설계자인 김종필은 박정희의 삼선개헌 이후 군부의 장기집권이 혁명의 가치를 훼손시킨다며 혁명세력내의 영구집권 반대의 대가로 전 재산을 몰수 당 하고 일본으로 망명 한다 제일교포인 춘산의 재종형 연중의 집에 수일 기거하며 5.16직후 춘산에게 정국이 안정되면 군은 복귀 할 태니 여당을 창당하여 국회를 정상화 시켜 주기를 간청하나 춘산은 600년 전 이성계의 조선건국 때 4세조 충헌공이 不事二君 하고 순창에 낙향 띠 풀집에서 기거한 사례를 거론하며 후손인 내가 어찌 선조의 뜻을 거역 하겠는가 라며 거절하고 감옥 을 택하여 2년의 옥살이를 한 사실을 거론하며 여야 정치인 중 가장 존경한 분이며 유신 후 군사제판에 징역 2년6개월이 확정되어 즐겨하신 술(양주) 1개월 한 박스 계산 30박스를 춘산 집에 보내고 위로를 드렸다 세 번째 중단된 湖南 湖西파의 統合 龜邨公의 마지막 제자며 門中의 마지막 門章인 윤조 동윤 홍집은 鄕校 大學등에 族譜講義를 하던중 姓氏의 本鄕은 始祖의 生存 行政地名을 사용함이 원칙이라면서 玉川趙門을 고려 말 淳昌縣이 本鄕인데 三國時代 의 行政地名인 玉川을 사용하는가에 대한 質議를 받고 몹시 당황 했다며 대종회장 春山에게 統合추진을 건의 하고 대종회의 決議를 거처 統合에 앞서 묘지가 소실된 선조 세분의 단을 조성하고 세보를 정리하기로 결정하고 推進하나 宗親會執行部의 交替와 內部의 分裂로 통합은 또다시 中斷 된다 戶籍法은 일제 强占期에 반 强制的으로 單行되어 始祖의 胎生 행정지명(貫鄕)을 무시하고 族譜의 책 名稱을 기재하여 玉川(대동보) 相好亭 節愍(파보) 심지어 系派譜의 명칭이 貫鄕으로 기재되어 있어 통합을 前提로한 命題로 誤記된 관향 修正마저 停止된 상태다 行錄을 마치며 辛丑年 春三月 全南 副知事 寶勳 君으로 부터 政治元老 春山 先輩님에 行錄 追書를 要請받고 대한민국 政府樹立 이후 초대 李承晩 정부와 軍部獨裁로부터 정치民主化를 開拓하고 평화적 政權交替를 成事시켜 暗鬱했던 한국정치를 선진국 隊列에 合流시킨 唯一한 정치인으로 정치의 根本은 治 字에 있으며 水(세상) 台(기쁨) 국민이 기뻐하는 愛民精神의 基盤위에 모든 行爲가 이뤄져야 한다는 政治人의 德目을 强調하시고 빛을 두려워하고 어둠에 親熟 할 줄 아는 信義를 지키는 정치인을 强調하시며 밝은 빛을 拒否하고 投獄과 모진 拷問을 選擇하신 唯一한 政治元老시다 後孫들이 그 뜻을 貴感하고 본받기를 바라며 本文은 한글로만 作成하고 行錄의 特性상 簡潔하고 死者의 姓名 표기는 指向하고 있으나 記錄의 歷史性을 감안 敍述的 전개와 實名이 자주 記錄되었음에 이해 求하며 尊敬하는 先輩님에 行蹟을 記錄하여 널리 알리고자 한다. 國會副議長 全南道知事 陽川人 許京萬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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